1 - 한 달 전 한국 방문을 한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의 병환으로 인한 방문이었다. 허리가 부러져 방문 한 병원행이 다른 병으로 발전하여 더 이상 나오실 수 없었고 10월에는 생사까지 오갔을 정도였다. 내가 방문했을 때의 12월 말은 큰 고비를 넘기고 나서 처음으로 가장 회복세가 좋았고 병원이 아닌 일반 병동이나 집에서 간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오갔을 정도였다.
전화 통화 당시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삼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만났던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바로 알아보셨을 정도로 정신이 돌아왔었다. 한국에 있는 2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한 간병을 했다. 정신이 거의 멀쩡 하셨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나에게 오히려 잠 좀 더 자고 밥을 먹으라고 얘기 할 정도로.
2 - 편식을 좀 하셨었다. 병원 밥 반찬에 누린내가 난다면서 반찬은 입에 대지를 않으셔서 대부분을 간장게장에 있는 간장에 밥을 말아드리면 그것을 드셨다. 고기 반찬은 내가 드셔야 한다고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몇 번 드리고, 국에 밥 말아서 조금씩 드리기도 했다. 공깃밥 4분의 1정도를 드시면 배부르다고 그만 드셨다. 약은 대부분 빻아서 드렸는데, 빻은 약에 물을 타서 몇 번 삼키고 나면 쓰니까 두유를 반 컵 정도 드셨다.
군것질을 좀 하셨다. 고모가 사다 준 빵이 커서 작게 쪼개 드리려고 하자 왜 뺏냐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정색을 하셨었다. 식도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물이나 음식물이 기도 쪽으로 넘어가면서 기침을 하는 것을 제대로 보아야 했다. 음식물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액체류. 그래서 물을 자꾸 달라고 새벽에도 보채셨는데, 너무 빨리 그리고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해서 물을 많이 못 드렸었다. 귤을 간식으로 드셨는데 귤을 씹고 투명한 껍질은 뱉으셨다.
진찰을 도는 의사와 이야기를 했는데 워낙 합병증이 많으셔서 과일도 원래 당 때문에 드시면 안 되었다. 당뇨에 고지혈증에 허리도 안 좋아서 앉을 수도 없었다. 짜게도, 달게도 드시면 안 되는데 안 먹는 것보다 뭐라도 섭취하는 것이 그나마 낫기에 드시고 싶은 것을 드렸다.
3 - 간병을 가장 많이 보시는 삼촌 내외가 그 날은 집에서 둘이 쉬시라고 2019년 연말과 연초에는 내가 자처해서 간병을 보았다. 연말이라고 옆 병동의 가족들이 와서 공동으로 쓰는 휴식공간에서 케잌을 썰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모를 짜증이 났다. 자기네 엄마가 아픈데, 앞뒤 사정은 좀 제쳐 두고서라도 연말인데 얼굴은 내 비쳐야 하지 않았을까? 큰 딸은 내가 한국에 있는 2주 동안 얼굴을 병원에 한번 보이지 않으면서 돈 이야기나 하셨다고 하고, 큰 아들이라는 놈은 지 다리 아프다고 못 온다고 하고. 그나마 말이 통하는 작은 딸은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는데 (일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가장 막내 (이면서도 가장 덜 사랑 받았을) 삼촌 내외가 돌보고, 자식들의 자식이 간병을 보는 이 상황에 짜증이 치솟았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서 속풀이 한 내가 싫었다. 병동 안에는 나와 할머니만 있었다. TV의 타종이 울렸다.
4 - 연초의 아침에는 눈이 내렸다. 비싼 편에 속하는 1인실 병동에는 바깥에 나갈 수 있는 테라스가 있었다. 높은 아파트 정글이 눈 앞에 보였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하나 폈다. 평소에는 담배를 안 피는데 한국에 있는 2주 동안 담배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할머니를 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을 거란 걸,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했다. 눈이 조용하게 내렸다. 차가운 아파트 정글이 그나마 따뜻해 보였다.
아침 밥을 드시도록 도와드리고,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약을 챙겨 드렸다. 몸이 무거운 할머니는 침대 밑으로 자꾸 몸이 내려가서 하루에 두 세어번 몸을 위로 올려야 했다. 팔다리는 가느신데 몸통에 살이 많으셔서 병원 침대위로 올라가 할머니 어깨를 받치고 몸을 올려야 했다. 내가 할머니가 좀 도와주셔야 해요 하면서 힘든 내색을 보이니 그게 웃기다며 웃으셨다. 중앙난방이라 어떨 땐 춥고 어떨 땐 더웠는데, 더워하셔서 손수건에 시원한 물을 적셔 등과 팔다리 등 곳곳을 닦아 드리니 어유~ 시원하다며 좋아하셨다. 좋아하시는 건 또 가만히 말씀을 잘 들으셨다. 밥 먹을 때는 안 먹겠다고 고개를 돌리시더니.
5 - 자기가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냥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하는 할머니 옆에서 삼촌이 손녀딸 아기 낳는 건 보셔야죠, 사는 재미를 또 찾을 거에요 라고 용기를 붇돋았다. 나는 배를 쑥 내밀면서 이것 보세요, 이게 똥배인지 아기 배인지는 알아야죠 라고 했다. 할머니는 내 더부룩 한 배를 만지더니 축하한다 라고 하셨다. 삼촌은 옆에서 이건 지금 똥배고 나중에 ~ 라고 장난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병원을 나서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는 동안 삼촌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할머니를 보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드렸다. 또 올게요 라고 말하며 평상시 처럼 병원을 나왔다. 하루하루 제 몸을 다해 사시는 분에게 대성통곡을 하고 나오는 것이야 말로 무례하다 생각했다.
6 - 할머니는 오전 8시 쯤 생판 모르는 이틀 된 간병인만이 병상을 지킨 채 조용히 가셨다. 가족 그 누구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침에 TV를 조금 보았다고 하던데, TV를 본 것인지 아니면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식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셨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가게 한 것은, 했어야 할 일을 다 해내지 못하고 간 자식들의 잘못이 없지않아 있을 것이다. 산 사람도 물론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 할 여지가 없다. 나도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일을 했다면 똑같았을 것이다. 다만 할 수 있는 여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선택을 한 것은 빌어먹을 짓이며 할머니를 불쌍하게 만든 일이다.
할머니는 자기 자식들만 아주 귀하게 키우셨다. 돈에 있어서는 모자라는 것 없이 살게 해 주셨다. 죽고 난 이후에 그나마 자식의 도리를 하겠다며 생전에 꽃을 좋아 하셨다고 장례식장에 가져온 것은 변태적인 자기 위안을 삼고자 한 일이었다. 살아 생전에 했었어야 하는 일을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은 사람이지 않고서야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7 - 할머니는 내가 한국에 왔다간 후 일주일이 좀 지나서 부터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고 한다. 내 멋대로의 해석이지만 그의 몸이 가장 최상의 상태일 때 나를 반긴 것이다. 나를 한번이라도 더 보고 가시려고 힘을 다해 정상처럼 다 하여 웃고 대화한 것이다. 손녀 딸에게 기저귀가는 것이 창피한 것 같으시면서도 그래도 얘가 어릴 때부터 내 똥오줌 가렸던 애라면서, 자기 몸 시원하게 닦아줬다면서 남들 앞에서 말로 애정을 보이셨다.
할머니는 내가 어린시절 때 몇 년동안 같은 집에서 같이 살았었다. 나의 국민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에 엄마아빠가 없는 자리에 대신 있어 주셨고 나에게 학교 끝나고 뭐 사 먹으라며 거의 매일 200원 씩 손에 쥐어 주셨었다. 할머니들 사이에서 화투를 치는 것을 재미삼아 구경하며 배웠고, 가끔씩 심부름 시키면서 남은 돈은 과자 사 먹으라고 하셨었다. 의지 할 어른이 집에 없었던 때 그나마 할머니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었다. 그런 할머니가 실린 운구차가 오늘 병원을 빠져 나갔다.
멀리 있는 손녀딸이 마지막까지 있어주지 못한것에 대해 너무 서운해 하지 않으셨기를.. 하늘 나라가 혹시라도 있다면, 사후에도 정신이 살아있어 몸을 떠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한번이라도 여기까지 날아오셔서 쉬었다 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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